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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열전] 순수한 사람 ‘이미륵’을 기억하다.“모든 경계를 넘어 인류를 사랑한 참 휴머니스트 ‘이미륵’”
▲ 이미륵 생전 사진<사진제공=이미륵 유족회>

[인천게릴라뉴스=박봉민 기자] 1950년 3월 20일, 독일 뮌휀 근교 그래펠핑에서 동양에서 온 한 사내가 생을 마쳤다. 혹자는 순수하다 했고, 혹자는 진정하다 했다. 그리고 모두는 그를 진짜 순수하게 사람을 사랑한 진정한 휴머니스트라 했다.

아시아의 작은 반도 조선에서 태어났으되, 온전히 조국이 품지 못했던 남자. 그는 생의 대부분을 타국에서 살았다 타국에서 생을 마치고 그곳에 묻혔다.

사내의 이름은 ‘이미륵(본명:이의경(李儀景))’이다. 그는 의사였고 철학자이자 작가였으며 혁명가이자 독립운동가였다. 또한 그는 한국 최초의 문화대사이다.

1899년 3월 8일 부유한 유학자의 집안에서 외동아들로 태어난 이미륵은 1917년 18살의 나이에 경성의학전문학교에 입학하며 의사라는 안정된 직업으로 첫발을 내딛었다. 부유한 집안의 배경과 안정된 직업으로 세속적 성공의 삶을 살 수 있었던 이미륵의 삶이 바뀐 것은 그의 나이 스물에 직면한 식민지 조국의 암울한 현실이었다.

이미륵은 스물 살이 되던 1919년 3·1운동에 적극적으로 가담하며 본격적인 항일운동을 시작한다. 그때에 그에게는 이미 6년 연상의 부인 최문호와의 사이에 두살배기 아들 명기와 갓난쟁이 딸 명주가 있었다.

3·1운동 이후 상해임시정부 소속의 항일단체였던 대한청년외교단에 가입해 일제 식민정책의 부당성을 국제사회에 알리는 외교시보를 발행하는 담당했던 이미륵은 이 일이 빌미가 되어 일제에 수배되고 상해로 망명해 대한적십자대 십자대원으로서 임시정부의 일을 돕는다.

상해 망명 중 독일 유학을 준비한 이미륵은 안중근 의사의 사촌인 안봉근과 독일령 로트링 태생의 선교사인 빌헬름의 도움으로 1920년 5월 독일로 망명해 유학생활을 시작한다.

조국을 떠나며, 동양을 떠나 유럽으로 향하며 대양 위에서 그는 알았을까? 다시는 조국을, 동양 대륙을 밟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을...

독일로 건너간 후 이미륵은 독일 뮌스터슈바르차하 분도히 수도원에서 어학수업을 받으며 본격적인 유학생을 준비하고 1921년 뷔르츠부르크대학교 의학부에 입학했다 1년 만에 건강악화로 휴학한 후 1923년 하이델베르크대학교에서 이학을 계속 공부하려 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휴학하고 1925년 뮌헨대학교로 전학해 동물학과로 전공을 바꿔 공부한다.

1928년에는 ‘Regulative Erscheinungen bei der Planarienregeneration unter anormalen Bedingungen(비정상적인 조건 하에서 플라나리아재생에 나타나는 규칙적인 현상들)’이라는 논문으로 뮌헨대학교에서 이학박사 학위를 취득한다.

1928년부터 1930년에는 뮌헨에서 서예를 가르친다. 그동안에도 이미륵은 벨기에 브뤼셀에서 개최된 ‘세계피압박민족결의대회’에 참가하는 등 조국독립을 위한 일도 계속한다.

“대륙을 넘은 우정과 사랑을 나눈 한국 최초의 문화대사 ‘Dr. Mirok Li’”

▲ 이미륵의 '압록강은 흐른다' 저서<사진=최도범 기자>

1931년 독지가 자일러 교수의 집으로 이사한 이미륵은 그때부터 작가의 길을 걷는다.

독일 문예지 ‘Dame(디 다메)’에 ‘Nachts in einer koreanischen Gasse(하늘의 천사)’를 독일어로 발표하면서 작가활동을 시작한다.

1943년에는 그래펠핑에 ‘Montags-Kolloquium(월요대담회)’라는 문인단체를 설립하고 광복 이듬해인 1946년 자신의 자전적 소설인 ‘Der Yalu fließt(압록강은 흐른다)’를 독일의 유명 출판사인 피퍼를 통해 출간한다. 이 책은 그해 독일의 한 잡지사에서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올해 독일어로 쓰인 가장 훌륭한 책’으로 선정되고, 수많은 언론을 통해 호평 받으며 독일 문단에 바람을 일으켰다.

그는 ‘Nachts in einer koreanischen Gasse(하늘의 천사)’, ‘Der Yalu fließt(압록강은 흐른다)’ 외에도 ‘lyagi(이야기)’, ‘Kampf um den Sohn(어머니)’, ‘Mudhoni(무던이)’ 등 다수의 작품을 남겼다.

1948년부터는 뮌헨대학교 동양학부에 외래교수로 초빙되어 한학과 한국학, 동양철학 등을 가르치며 한국, 나아가 동양문화를 세계에 알리는 일에 앞장섰다. 그를 한국 최초의 문화대사라 부르는 이유다.

그에게도 마지막은 찾아 왔다. 어려서부터 병약했던 이미륵은 위암이 발병해 1950년 3월 20일 그래펠핑에서 향년 51세를 일기로 타계한다. 그리고 그 땅에 묻힌다.

마지막 순간까지 그는 조국을 그리워했다. 마지막 임종의 순간 독일인 친구들과 제자, 자일러 부인 등이 지켜보는 가운데 진통제를 맞으며 낮은 목소리로 애국가 중 “우리나라만세”를 불렀다.

이미륵의 일생은 인종과 문화, 국경, 모든 경계를 넘어 인류 본성 자체를 직시하며 인간을 사랑한 진정한 휴머니스트로서의 삶이었다. 많은 독일인들이 순수한 사랑으로 사람과 마주했던, 대륙을 넘은 우정과 사랑을 보냈던 진정한 휴머니스트 이미륵의 일생에 존경을 보냈다.

대한민국 정부 역시 조국독립을 위해 바친 그의 일생의 공로를 인정해 1963년 대통령표창을 수여하고,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태초에 우주는 무한하고, 또한 지극히 평등하였다. 지구별의 모든 것들이 태초에 순수하였다. 고로 모든 것의 본성은 순수하다. 인간 ‘이미륵’은 지극히 순수했던 태초의 그것을 그리워했고, 그것을 완성하고자 했던 사람이다. 그래서 조금은 낯설었던 그의 삶에 경의를 표한다.

박봉민 기자  ingnews@ingnew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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