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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층 보도①] 월미도 주민의 실향, "누가 이들의 고향을 가져갔나?"월미도 미항만 부지의 국유화는 정당했다
징발된 토지 만석동 90번지의 의미
절규하는 월미도 주민들...우리도 대한민국의 국민이다
▲ 68주년 인천상륙작전 전승행사.<사진=최도범 기자>

[인천게릴라뉴스=최도범 기자] 지난 15일 인천 월미도 해안가 주차장에는 1950년 9월 15일 맥아더 장군의 지휘로 감행된 전승의 ‘인천상륙작전’ 기념행사가 참전용사 대표 및 23개 참전국 국기 입장을 시작으로 전황 보고, 영상 시청, 참전용사 회고사, 심승섭 해군참모총장의 기념사, 박남춘 인천시장 축사, 기념공연 순으로 진행됐다.

이날 행사에는 국내외 참전 용사들과 장병, UN참전국 무관단, 일반시민 등 1800여명이 함께 모여 그날을 기념했다.

하지만 이날 행사장 뒤편에는 인천상륙작전 당시 미군의 사전 폭격으로 희생된 주민들이 최소한으로 희생자의 넋을 기리는 예를 갖춰 달라는 일인 시위를 펼쳤다.

이날 희생자 주민의 가족들은 ‘월미도 희생자들의 넋을 기려 달라’ 그리고 ‘우리들의 고향으로 돌려보내 달라’라는 주장을 폈다.

‘인천게릴라뉴스’는 월미도 실향민들에 대해 ‘인천상륙작전’ 당시에 어떤 일이 있었으며 주민들의 희생에 대해 국가는 어떻게 아픔을 어루만졌는지 기획으로 살펴본다.

▲ 월미도귀향대책위원회가 준비해 진행하는 희생자 위령제가 전쟁 68주년을 맞아 12회째 열렸다.<사진=최도범 기자>

인천지방법원, 월미도 미항만 부지의 국유화는 정당???

‘구 귀속재산처리에관한특별조치법(1963. 5 .29. 법률 제1346호, 실효) 제2조 제1호 및 부칙 제5조에 의하면 , 1964년 12월말까지 매매계약이 체결되지 아나한 귀속재산은 무상으로 국유로 한다고 규정되어 있으므로 그날까지 매각되지 아니한 귀속재산은 1965. 1. 1.부터 국유재산이 된다고 할 것이다.(대법원 2000. 6. 9. 선고 99다 36778 판결 참조)

이 사건에 관하여 살피건대 원고(월미도 실향민)들이 주장하는 바와 같이 이 사건 토지를 귀속재산(대한민국 정부에 이양된 일본인의 모든 재산)이라고 본다 하더라도…….(중간 생략)…….1964년 12월 말일까지 매각되었음을 인정할 증거가 없음으로…….국유재산이 되었다고 봄이 타당하다.’

상기의 내용은 인천상륙작전시 월미도에서 미군의 무차별 폭격으로 희생됐다고 주장하는 거주민들이나 그 상속인들이 정부를 상대로 귀속재산처리법상 우선매수권 침해로 인한 손해를 배상할 책임을 묻는 소송에 대해 인천지방법원이 원고의 소를 기각한 판결 요지 내용이다.

다시 말해 재판부는 월미도의 국유지에 무단으로 살아온 원주민들이 해방 이후 귀속재산으로 정부로부터 토지 매매를 1964년 12월 말일까지 진행한 사실이 없어 이를 국유지로 봄이 타탕하다는 결론을 낸 것이다.

이 판결에서 재판부는 그 유사 내용으로 앞에서 적은 ‘대법원 2000. 6. 9. 선고 99다 36778 판결’을 참조했다고 밝히고 있다.

이 재판은 고등법원에서도 유사한 판결을 받아 원고가 패소했다. 지금은 실효됐지만 당시의 귀속재산처리법상 귀속재산에 대해 원고의 매매 행위가 없는 관계로 소유권은 국가에 권리가 있다는 판단이었다.

2013년 판결한 이 재판의 결과는 결국 월미도 실향민들을 궁지로 몰았고 이 판결에 앞서 2008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가 밝힌 진실규명으로 미국과의 협상을 통한 실질적 피해 보상과 주민들의 귀향 및 위령사업 지원, 가족관계등록부 정정을 비롯한 명예회복 등의 조치 권고는 모두 물거품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법원이 참조한 대법원 2000. 6. 9. 선고 99다 36778 판결 요지에 따르면 ‘재조선미국육군사령부군정청법령 제2호, 제33호, 대한민국과미국사이의재정및재산에관한최초협정 제5조, 귀속재산처리법 제4조, 제34조, 제40조의 각 규정에 의하면, 1945. 8. 9. 이후 일본정부나 일본인 등의 소유로서 미 군정청의 관할 내에 존재하는 재산은 1945. 9. 25.자로 미 군정청의 소유로 되었다가 1948. 9. 11.자로 대한민국에 그 권리가 이양되었고 점유자는 단순한 보관자의 지위에 있는 것에 불과하여 그에게는 귀속재산의 처분권한이 없고 처분을 하더라도 무효이며 이에 위반할 때에는 처벌을 받도록 규정되어 있으므로, 시효취득을 주장하는 점유자가 사인(私人)에게는 처분권한이 없는 귀속재산이라는 사실을 알면서 이를 매수하여 점유를 개시한 경우에도 위 법리에 비추어 자주점유의 추정이 번복된다고 보아야 한다.’라고 판결 내용을 밝히고 있다.

이 내용을 정리해 보면 원고는 일본 정부나 일본 개인의 땅을 점유하고 있는 상태로 귀속재산의 토지가 미 군정청으로 귀속됐다가 대한민국 정부로 이양된 상황에서 귀속재산 처분에 대해 점유자인 원고가 시효취득을 주장해 해당 재산의 처분권리가 없다는 내용이다.

고로, 귀속재산처리법에 따라 정해진 시한을 넘겨 월미도 원주민 주거지가 귀속재산으로 국가에 권리가 이양됐다는 월미도 배상 청구의 소송과 상기의 대법원 판결 요지를 인용한 판단은 쉽게 이해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아울러 실향민들이 귀속재산처리법에 따라 월미도 토지를 매매해야 했다는 법원의 판단에 대해서는 당시에 미군이 주둔한 토지에 대해 개인이 매매를 진행했어야 했다는 것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주문이며 이 토지에 대해 미군은 당시에 강제 주둔 상태였으며 이후 징발했다고 서면에 표시하고 있다.

여기에서 징발된 토지는 개인의 땅을 전시 상황에서 국가가 필요에 의해 사용한다는 것으로 당시 미군의 강제 주둔과 이후 징발 토지란 판단, 그리고 해군본부에서 제5해역 사령관에게 보낸 서류에 미군 반환 기지 토지에 ‘불명 재산을 보전 등기 필하고...’라는 내용에 불명 재산으로 ‘북성동 1가 79번지 외 14필지’라고 직시함으로 월미도 주민이 주장하는 개인 소유 토지가 미항만 사령부 주둔지에 있다는 사실과 이를 부당하게 국유화 했다는 반증이라고 실향민들은 주장한다.

즉, 전시 상황에서 동사무소에 대한 포격으로 소실된 서류로 인해 소유주가 확인되지 않은 토지를 미군이 기지로 징발해 사용하고 이를 미군으로부터 반환 받은 국방부가 불명 재산으로 군에 보관환(고정자산 관리) 조치해 국유재산으로 전환했다는 것이다.

징발된 토지 만석동 90번지

▲ 징발 민유재산에 대한 조치를 전하는 공문.<자료=월미도귀향대책위원회>

73년 1월 5일자, 국방부가 해군 참모 총장에게 보낸 주류군(일시적으로 머문 군대) 재산 보관환 문서에는 ‘미항만 사령부 부지의 국유재산 및 징발재산을 별첨 명세서와 같은 재산 인계하니 재산관리에 만전을 기할 것’을 주문하는 문구가 있다.

아울러, ‘징발 민유 재산은 징발재산에 관한 특별조치법에 따라 매수 조치되어 매수 통보할 때까지 민유 재산으로 관리환하고…….’라는 문구로 볼 때 월미도 미항만 사령부 부지에 민간 토지의 징발이 있었다는 것을 확인시키고 있다.

▲ 월미도 국유재산 토지 목록에 만석동 90번지가 없다.<자료=월미도귀향대책위원회>

문제는 징발된 국유지와 민유지들 가운데 존재하는 토지 90번지가 국유지도 아니고 민유지에도 포함되지 않은 가운데 불명 재산으로 징발됐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월미도 주민들이 주장과 일치하는 대목이 있다.

‘1950년 3월 30일 귀속재산처리법에 따라 토지 대장을 신청하는 과정에서 세 차례의 주민 합의를 통해 당시 동사무소에 6월 초경 토지대장을 신청했으나 25일 전쟁이 터지며 업무가 마비되고 인천 상륙작전의 포격으로 동사무소가 파괴되며 해당 서류가 소실, 이후 토지 소유 증빙 자료가 없다’는 주장이 바로 그것이다.

즉, 불명재산 토지 90번지가 이들 실향민들의 토지이며 전쟁으로 시기를 놓히고 미군의 주둔으로 1964년까지의 ‘귀속재산처리에관한특별조치법’에 따른 매매 행위를 제한 당해 지금까지 불명으로 남은 토지라는 것.

결과적으로 해군본부가 불명재산 만석동 90번지의 소유권을 주장하는 주민들에게 관련 소유권 주장 증명 서류가 없다는 이유로 토지를 국유화했다는 것이다.

▲ 월미도귀향대책 주민이 가족들의 희생에 대해 호소하는 일인시위에 참전 용사의 무거운 시선이 느껴진다.<사진=최도범 기자>

월미도 원주민들의 절규

1950년 9월 10일, 이미 북한 인민군에 의해 점령당한 월미도는 미군 해병대항공단 제15항모전단 항공모함에서 이륙한 VMF-214와 323 해병항공기의 네이팜탄과 기총 소사는 월미도 동쪽 민가 밀집지역을 지옥의 불야성으로 만들었다.

적진인 월미도로 미군이 상륙해야하는 시점에서 월미도에 주둔하고 있는 인민군의 무력화를 위한 작전으로 진행된 이날의 폭격은 13일과 14일 계속된 함포사격과 함께 월미도를 더 이상 사람이 살 수 없는 땅으로 만들었다.

이날 간신히 월미도를 벗어난 사람들은 “비록 우리들은 생명을 부지했지만 바로 눈앞에서 가족들이 불바다 속에 신음하고 죽어가는 비참한 상황을 지켜보며 절규하는 것만이 우리들이 할 수 있는 전부였다”고 그날을 기억한다.

전쟁이 끝나고 돌아온 고향 월미도에는 더 이상 희생자 가족들이 안주할 집은 불타 없어 졌고 그 자리엔 코큰 미군들이 자리하고 있어 들어갈 수 없는 땅이 됐다.

이때부터 월미도 희생자 가족들은 실향민의 세월을 보내기 시작하며 지금까지 외로운 싸움을 시작했다.

이들은 1951년 2월 12일 ‘월미도 원주민 귀향 대책회’를 구성하고 이듬해 3월 인천시에 귀향을 요구하는 진정서를 제출했으며 원주민 거주 확인을 위한 동장의 확인을 받는 등 다각적인 노력을 펼쳤다.

이때 인천시청은 실향민들에게 미군이 철수할 경우 귀향을 시켜 주겠다고 약속했으나 1971년 미군이 철수하자 인천 ‘해군경비부’가 주둔했고 결국 국방부에 징발당하는 과정을 거치며 이들은 이방인이 되어 갔다.

군부 혁명으로 군인이 통치하던 시절, 민간인이 정부를 상대로 재산권을 주장하기는 하늘의 별 따기였으며 군이 떠나간 장리에 들어선 공원으로 인해 월미도 귀향의 바램들은 나날이 빛을 잃어가며 더 이상 세간의 기억 속에서 사라져 갔지만 이와는 반대로 주민들의 귀향 의지는 나날이 굳어져 갔다.

이후 2006년 진실과 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에 진실규명을 요구했고 비로써 2008년 전쟁 58년 만에 미군폭격으로 주민이 희생됐다는 진실을 위원회가 규명해 주길 10년이 지난 지금에 이르렀다.

하지만 10년이 지난 지금까지 과거사 정리위의 미군과의 피해보상과 위령탑 조성 등의 권고 사항은 단 하나도 이행되지 않은 채 지금까지 실향민들의 절규로만 메아리 치고 있다.

▲ 월미도귀향대책위원회 한인덕 위원장이 해군 행사 담당 장교에게 호소문을 전달하며 눈물을 글성이고 있다.<사진=최도범 기자>

한인덕 월미도귀향대책위원장은 ‘인천게릴라뉴스’와의 인터뷰에서 “국가는 국민의 재산과 생명을 지켜야 할 책임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우리에게 국가는 더 이상 국가의 책무를 논하지 않는 강제 집단에 불과하다”며 “누구나가 누리는 자유 대한의 국민 권리를 우리에게도 누릴 수 있게 도와주길 다시 한 번 간곡히 부탁한다”고 호소했다.

그녀는 또 “지난 15일 우리는 해군 소속의 월미도 행사 주관 장교에게 해군 참모총장에게 보내는 ‘호소문’을 전달하며 인천상륙작전으로 희생된 민간인들에 대해 행사에 앞서 넋을 기리는 기본적인 대우와 귀향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달라고 부탁했다”며 “그나마 박남춘 인천시장이 처음으로 우리 민간인들의 희생에 대해 넋을 기리는 축사를 해줌으로 우리는 위로를 받았다”고 눈물을 훔쳤다.

다음호에선 진실·화해 진상규명위원회의 권고와 정치권에서의 관련 법안의 발의, 월미도 장기민원 조정 위원회의 활동 등을 살펴본다.

최도범 기자  ingnews@ingnew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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